성벽으로 둘러싸인, 미로를 연상시키는 고대 도시에서 눈을 뜬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견뎌온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는, 빛이 바랜 상아색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각각의 건물은 위용을 뽐내면서도 어딘가 모를 다정한 분위기를 풍긴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가져다준 다정함에 감사하며, 눈이 부실 것은 아랑곳 않고 태양을 바라본다. 유난히 더 가깝고 밝게 느껴지는 태양에 눈을 찡그리던 순간, 갑자기 느껴지는 기척에 시선을 옮긴다. 사슴이다.
신기한 듯, 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더니 한 골목으로 걸음을 옮긴다. 호기심에 사슴을 쫓는다. 돌아보진 않지만 귀를 쫑긋 세우곤 일정한 걸음의 속도를 유지하는 사슴을 보고, ‘우리 같이 걷고 있구나’ 안심하며 보폭을 맞춘다.
시간은 흐르고, 계속해서 걷는다. 우리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진다. 수많은, 좁은 골목들을 지나 도착한 곳에서는 이 도시를 둘러싼 성곽 바깥의 모습이 펼쳐진다. 저 멀리 지평선과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 보인다.
나는 사슴에게 한 발 다가간다. 사슴도 뒤돌아 한 발 다가온다. 긴 산책에 지쳤는지, 우리는 한동안 앉아 말없이 지평선과 하늘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노을이 지고, 서서히 찾아온 어둠은 우리의 그림자를 데려간다.
사슴은 일어나 우리가 걸어왔던 골목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 나도 사슴을 뒤따른다. 이전과 달리 어두워진 골목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내가 귀를 모으고 사슴의 발소리에 의지해 따라간다.
잠깐의 찰나, 앞서가던 사슴은 빠른 속도로 방향을 바꾼다. 뒤따라가던 나를 지나 함께 노을을 바라봤던 성곽을 향해 달린다. 성곽 너머 지평선을 향해 계속해서 달린다. 발소리는 멀어진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는, 달리기 시작한다.
다정함을 풍기던 이 도시에도 예외 없이 찾아온 어둠은 사슴을 데려갔다. 나는 남겨졌다. 미로와 같은 도시에서 길을 잃은 나는 계속해서 달린다. 그리곤 정신을 잃는다.
환한 태양에 찡그리며 눈을 뜬다. 이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느 때와 같은 다정함으로 나를 맞이한다. 나는 이 다정함을 뒤로하고, 짧아진 그림자와 함께 성문을 찾아 나선다. 돌아보진 않지만 귀를 쫑긋 세운 채
'해답은 시도 속에 존재할테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래의 의미를 잃은 그 말의 조각들 (2018년 1월 27일) (0) | 2020.09.10 |
---|---|
"Eternity was in that moment." (2018년 1월 20일) (0) | 2020.09.10 |
이보다 멋진 선물은 없어! (2018년 1월 17일) (0) | 2020.09.10 |
나답지 않음과 마주하기 (2017년 12월 31일) (0) | 2020.09.10 |
댓글